경상남도 거제군에 속해 있는 아주(鵝洲)는 원래 신라의 거노현(居老縣)인데 청주(菁州 ; 진주)에 속하였고, 경덕왕 때 아주(鵝洲)로 고쳐서 거제(居濟)에속하였다.
◈ 창씨연유 및 개요
아주신씨의 근원은아주현의 호장 신영미(申英美)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있는 문헌(文獻)이 있다.이것은 조선조(朝鮮朝) 왕명(王命)에 의해서 인물(人物), 세헌(世獻) 등에 관해서편찬을 한 국가적(國家的) 문헌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라는책이다. 이 문헌비고는 조선 21대 영조 (英祖) 때 편찬된 것이다. 그리고 1924년 일제치하 (日帝治下)에서발행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라는 책도 있다. 문헌비고의 기록 뿐만 아니라 이 책에도 아주신씨의 시조는 신영미(申英美)라고 표기되었다.
조선 순조 때 사람인 신정주(申鼎周)가 저술한 『호서기행(湖西紀行)』에의하면 1817 (순조 17)년 공주(公州)의 김노정(金魯定)이 만성보(萬姓譜)를 만들때 신익휴라는 가공적 인물을 평산 신씨의 시조 신숭겸(申崇謙)과연계시켜 위조했다고 하며, 영조 때 편찬된 『문헌비고(文獻備考)』와 1924년에 발행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비롯한 아주 신씨의 가첩(家牒)에는 고려 때 아주현(鵝洲縣)의 권지호장(權智戶長)인신영미(申英美)가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아주신씨선대사적(鵝洲申氏先代事蹟)>이란 자료를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이 글은 시조 신영미(申英美)에 대하여설명을 하는 내용이다.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에서권지호장(權知戶長)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三國時代) 패기가 있는무인(武人)들의 호족세력으로 주(州), 군(郡), 현(縣)에 거주하며토지(土地)를 가진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나라에 바치는물자와 세금을 보내고 하였다. 이로 인해서 지역에 호장이란 게 있었고 본관을 갖는 바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나라에서 향리(鄕吏)라는 관직(官職)이 시작된 것이다.」[高麗朝權知戶長三國之季人各以豪武覇於洲郡縣據有土地人民以輸貢賦於國因以爲所在戶長育子長孫遂爲本貫此我國鄕吏之始也] 여기서 권지(權知)는 관리시보(官吏試補)의 뜻을가지고 있으며 임시로 어떤 공무(公務)를 관장한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호장직(戶長職)에 있으면 자손들이 과거시험에 나갈 수도 있고 중앙관서(中央官署)에 진출하여사족(士族)이 되는 기회도 있었다. 시조의 증손(曾孫) 신윤유(申允濡)가 그 예의인물로, 고려 말 판도판서(判圖判書)라는 벼슬을지냈던 인물이다.
<세첩권수소지[世牒卷首小識] 관향 아주의 내력> 신체인(申體仁1731~1812)
아주(鵝洲)는 거제(巨濟)의 속현이다. 지금 거제부(巨濟府) 아주현(鵝洲縣)에 여전히많은 신(申)씨들이 있다고 한다. 혹자가 이르기를, ‘한산(韓山)의 옛 이름이 아주(鵝州)이니 신씨의 선조는 아마 한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한다. 그러나 주(洲)자와 주(州)자는 진실로 같지 않다.
살피건대 퇴계 이황 선생이 일찍이 참봉(參奉) 신춘년(申椿年) 어른의 묘갈명을지으면서 “공은 거제 사람”이라 하였고 우리 할아버지 고송(孤松) 부군의 사마방안(司馬榜眼) 인쇄본에 “본(本)은 거제(巨濟)”라고 적혀 있으니 아주(鵝洲)가 거제지역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옛 전적을 보면 혹 거제(巨濟)로 적거나혹 아주(鵝洲)로 적어서 번갈아 쓰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지금 종친(闔族)들이 혹 본을 거제로 적는 이가 없고 아주(鵝洲)로만 칭하여마치 서로 상의한 듯하니 이것이 어느 세대부터 시작됐는지 모르겠다. 또 선배가 손수 쓴 시전(詩牋), 제명(題名)과 같은첩(帖)들을 보면 더러 ‘매성 후인(梅城後人)’이라고칭하였으니, 혹 거제현(巨濟縣)이 일명매성(梅城)으로 불렀는지 이 또한 모르겠다.
살피건대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부인이 바로 아주 신씨(鵝洲申氏)인데 주(洲)자가 더러주(州)자로 적혀 있다. 《포은집(圃隱集)》에 실려 있는 <포은문과 방목(圃隱文科榜目)>에 “신인보(申仁甫)가 병과(丙科) 1인으로 발탁되었으니 그 관향이 아주(鵝州)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주(州)자 또한물 수(水)를 쓰지 않았다. (왜 그런지)알 수는 없겠으나 이 또한 거제의 아주(鵝洲)인데 주(洲)자와 주(州)자는 음이같고 글자가 서로 비슷하므로 이내 잘못 쓴 것을 면치 못한(몰랐던) 듯하다. 아니면 별도로 하나의 신(申)씨가 한산(韓山)에서 나온 것인데 저대로 한산의 옛 이름으로 관향을 삼은 듯하다.
혹자는 “아주(鵝洲) 성씨는 본래평산(平山)에서 나뉘어져 나온 것으로 모두 장절공(壯節公, 평산 신씨신숭겸)의 후손이다.”라고 하는데 그 말이 이상할 것은 없으나근거할 만한 믿음직한 전적이 없다. 마땅히 박아(博雅)한 군자를함께 기다려 다시 질정(質正)해야 할 것이다.
신해년(1791년)에 아주 후인(後人) 신체인(申體仁1731~1812)이 병들고 죽을 나이에 근본과 시조를 미루어 생각하여 세계(世系) 한통을 만들고 사실과 관련된 글을 대략 덧붙여 본관과 고을을 궁구하여 논하고 후인들에게고칠 수 있도록 하노라. [鵝洲巨濟屬縣今巨濟府鵝洲縣尙多有姓申者云或謂韓山舊號鵝州申之先疑出於韓山而州與洲字固不同按退溪李先生嘗撰申參奉諱椿年墓碣曰公巨濟人我先祖孤松府君司馬榜眼印本書曰本巨濟鵝洲之爲巨濟地無疑矣故觀故籍或書以巨濟或書以鵝洲未嘗不迭用而今闔族無或以巨濟書本但稱鵝洲若相謀然未知始於何代又觀先輩手書如詩牋題名等帖或稱梅城後人或巨濟縣一名又稱梅城歟亦未可知也按吉冶隱夫人是鵝洲申氏而洲字或書以州圃隱集載圃隱文科榜目有曰申仁甫擢丙科一人其貫曰鵝州而州字亦不從水未知是亦巨濟鵝洲而洲與州音同而字相近故乃未免錯書歟抑別有一申姓出於韓山而自以韓山舊號爲貫歟或云鵝洲氏是本自平山分出俱爲壯節公後其說亦無怪而無信籍可据宜幷竢博雅君子更質焉歲辛亥月日鵝洲後人申體仁衰病垂死追惟本始爲修世系一通略附以事實文字因究論所貫鄕邑俾後人得有所攷云爾]
회당선생문집(悔堂先生文集) 신원록(申元祿)
申元祿 (1516~1576) ; 字 季緩,號 悔堂, 本貫 鵝洲. 居 義城.
木板本. -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1769.
4卷2冊 : 揷圖, 遺墨, 年譜, 四周雙邊半郭 19.8 x 16.3 cm, 有界, 10行18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0.9 x 21.3 cm.
조선 전기의 학자인신원록의 시문집이다. 퇴재(退齋) 신우(申祐)의 6세손이다. 참봉을 지낸 신수(申壽)이다. 11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병이 들어 인근에서 약을 구할수가 없어 집에서 수백 리가 떨어진 팔공산까지 직접 가서 약을 구해 왔다. 그러한 정성으로 형인 신원복(申元福)과 함께 8년 동안아버지를 간호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홀로 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연친곡(宴親曲)」 8규(閨)를 지어 불렀다. 어머니의상을 당해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세 번 성묘를 하였다. 남명 조식에게 먼저 나아가 학문을 닦다가신재 주세붕이 백운 동서원을 건립하자 그곳으로 나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그리고 스승 주세붕이 세상을떠나 자 심상(心喪) 삼년을 지냈다.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재임할 때에는 백운동서원에 머물 며 구봉령, 조목, 김팔원(金八元) 등과강론하며 교유하였다. 또한 하서 김인후를 종유하며 학문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1551년에는 서원을 세워 의성이 관향인 모재 김안국을 배향 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 일로 “장천(長川)”이라는사액을 받게 되었다. 그 밖에 향리를 위해 스승 퇴계에게서 향약을 필사해 와 실행하고, 난민을 구제하기 위해 진휼장(賑恤場) 을 운영하고, 고장의 발전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대소과(大小科) 출신 인사들의 모임인 연계소(蓮桂所)를 설립하고, 문중인사를 모아 사당에 참배하고 학문을 권장하는 모임인 월삭회(月朔會)를조직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세상을 떠난 지 39년 뒤인 1615(광해군 7)년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그가 살던 마을에 효자문이 세워지고 통정대부 호조참의 에 추서되었다. 그리고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이 문집은 6세손 정모(正模)가 1740(영조 16)년에 편집하였으나 간행은 1769년경에 이루 어진 듯하다. 부(賦)의 「삼근(三近)」은 지(知), 인(仁), 용(勇)의 삼덕목을 노래한 것이고 나 머지 3수도 철리(哲理)를 읊은 것이다. 서(書)는 주세붕과 서원 학생에게 보낸 것으로 장천서원(長川書院)의 운영에 대한 내용이다.
잡저에는 「유붕자원방내불역낙호론(有朋自遠 方來不亦樂乎論)」․「업유재완의(業儒齋完 議)」․「진제장지(賑濟場志)」․「장천서원영건전말(長川書院營建顚末)」 등이 실려 있다. 「업유재완의」는 향교의 학자금에 대한 규정이고, 「진제장 지」는 1553년과 1554년의 기근구휼에 대한 것이다. 「장천서원영건전말」에는 김안국(金安 國)을 제향한 장천서원 건립의 전말을 싣고 있다. 잡저에 실려 있는 서원에대한 기록은 초기 서원의 운영과 재정연구의 자료가 된다. 제문은 김사걸(金士傑), 조종돈(趙宗敦) 등에 대한 것이다. 「효우록(孝友錄)」은 저자가 아버지 수(壽)의병간호와 어머니의 상(喪)때의 효행으로 효자문이 세워진 경과를적은 것으로 형 원복(元福)이 기록하였다. 손자 열도(悅 道)가편한 「사우록(四友錄)」에는 저자의 사우 74인의 행적과 그들이 저자에게 준 시문이 들어 있다.
2卷1冊 : 世系圖, 四周雙邊 半郭 17 x 15.7 cm, 有界, 10行17字 註雙行, 上下向二葉花紋魚尾下向一葉花紋魚尾 ; 30.5 x 21 cm.
조선 전기의 학자인신흘의 시문집이다. 원록(元錄)의 아들이며 의성 사람이다. 아버지가 죽자 3년 상을 마친 후 묘아래 집을 지어 영모(永慕)라는 편액을 달고 종신토록 애도하 였다. 임진왜란에 백씨 신필(申佖)과 더불어 의병을 창기하고 수백 명을 모집하여 김해, 류종개, 정세아와 함께 적에 대항하였다. 1603년 조명(朝命)으로『난중사적(亂中事蹟)』을 찬진(撰進)하였다. 1608년당질(堂姪) 홍도(弘道)와 이언적을 위해 변무하였고, 1611년 정인홍이 국정을 농단하고성현(聖賢)을 모함한 죄를 논핵하였다. 1749(영조 25)년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이 문집은 1909년 10세손 돈식(敦植)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書) 가운데 「여도내의장 김한림(해)유정자((종개)정진사(세아)(與道內義將金翰林(垓)柳正字(宗介)鄭進士(世雅)」를 보면 일직현(一直縣)에서 결진(結陣)한 의병의작전수행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의병들이 다른 부대와 연합작전을 펴지 않고 이웃고을의 의병이 위급하여도 도와주 지 않으며 싸움을 미루고 세월만 허송하고 있음을 지적한 뒤 머지않아 바닥이 날 군량과 백성에 대한 신뢰를 실추, 그리고 이에 따른 이합집산을 말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죽기 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촉구하였다. 잡저의 「엽공위덕비(葉公威德碑)」는예천에서 안동 방면으로 진영을 옮겨온 명나라 장수의 노고를 치하한 내용으로 명나라 사람들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상방백이완평(원익)(上方伯李完平書(元翼)」은 전란이 끝난 뒤 전란 에 대한 기록을 실록청(實錄廳) 제공하면서 자신의 감회를 밝힌 내용이다. 임진왜란 당시 지방의병의 활동과 실상을 이해하는 데 간접적으로 참고가 된다.
序 ; 柳道獻, 金道和
世系圖.
目錄.
卷之 1. 賦 ; 耻惡衣惡食者學者之大病, 閉戶焚衣冠, 鍾山放魚, 不登衡獄, 印.
詩.
疏 ; 請流高敬履仍請五賢從祀, 請辨鄭仁弘誣詆文純公李滉.
書 ; 答太學士林, 與道內義將金翰林(垓)柳正字(宗介)鄭進士(世雅), 上方伯李完平(元翼).
祭文 ; 李鶴洞(光俊).
雜著 ; 書旅軒說後, 願留張侯(顯光)狀, 記聞錄, 勞葉遊擊(思忠)文, 葉公威德碑.
卷之 2. 附錄 ; 行狀, 墓碣銘, 墓誌, 墓表, 祭文, 輓詞.
응암실적(鷹巖實蹟) 신지효(申之孝)
申之孝 (1561~1592) ; 字 達夫,號 鷹巖, 本貫 鵝洲. 居 義城.
木板本. -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純祖 17(1817)跋.
1冊 : 世系圖, 四周雙邊半郭 19.3 x 16 cm, 有界, 10行17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2.7 x 21.1 cm.
조선 중기의 학자인신지효의 유문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부장(部將)을 역임한 신한(申翰), 할아버지는참봉을 역임한 신응규(申應奎), 아버지는 증좌승지 신몽득(申夢得), 어머니는 증공조참의 박민수(朴敏樹)의 딸인 증숙부인 월성 박씨,부인은 습독(習讀)을 역임한 김준 창(金俊昌)의 딸인 함창 김씨로 알려져 있다. 신지효는 7형제 중 장남이다. 중제(仲弟) 신지제(申之悌)가 문과 급제하며 현달하였다.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풍리리에 거주하였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수려하고 효우가 있었다고 한다. 18세때 교임(校任)이 되었으며,25세 때 고을 사람들이 교장(校長)으로 추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선조25)년 5월 왜병을 피해 어머니 고창 오씨(아버지신몽득의 후처)를 모시고 응동(鷹洞)(또는 천동 (泉洞) ; 현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 암혈(巖穴)에 피신하였다. 그러나 쫓아온 왜병 에게 발각되어 왼쪽 어깨를 칼로베이고 말았다. 피를 흘리며 죽기 직전 신지효는 칡을 입으로 씹어 붓을 만들었다. 이어 예안현감을 지내고 있던 중제(仲弟) 신지제에게 주기 위한 혈서(血書)를쓰고 난 뒤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혈서에는 “나의 몸가짐이 조밀하지 못하고 효성이 없음이 이보다 더할수가 있겠는가? 늙은 부모는 여러 아우들이 있어 받들 어 모시고 있거니와, 군(君)은 이미 몸을왕실에 맞긴지라. 직수(職守)가 있는 터이니 마땅 히 난에 임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고 실석(失石)을 무릅쓰고 죽음에 나갈 것이며, 내 시체 를 찾지 못할까 걱정하여다행히 발바닥에 ‘선성(宣城 ; 예안의 다른 이름)’ 두 글자를 써서 알도록 하였노라!(吾之藏身 不密不孝 孰甚焉 老親則有諸弟奉侍君旣委身王室 有職守 當臨亂 授命而失石 赴死之日 恐無以尋屍 幸於足掌 書宣城二字 俾識之)”라고 쓰여 있었다고한다. 중제(仲弟) 신지제와더불어 김언기 문하에서 수학하며, 퇴계학맥을 계승하였다.
별도로 남긴 유고는없으며, 유문으로 『응암실적(鷹巖實蹟)』이 있는데, 1817년 편찬한 1책 44장의 목판본과 1933년에 편찬된 1책 72장의 석인본이 전하고 있다.『응암실적』에 수록된 「혈서습록(血書拾錄)」은신지제의 후손 신체인이 작성한 것으로 신지효의 ‘혈서’가 작성된 경위와 그것을 기리는 의의 등이 언급되어 있다.금산서원(錦山書院)(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구산리에 위치)에 중제(仲弟) 신지제(申之悌), 신지제의후손 신체인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금산 서원은 신체인이 강학을 위해1782년 건립한 금연 정사를 1977년 중건하고,1981년 서원으로 변경한 것이다. 신지효의 위패는2005년 추향된 것이다. 추향 당시 봉안문은 류용훈(柳龍勳)이 작성하였다. 한편 신지효가 왜군에 의해 죽은 응동(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에는 재실인 응암재(鷹巖齋)와 유허비(遺墟碑)가 건립되어 있다.
5冊 : 四周雙邊 半郭 :18x 13.6 cm, 有界, 10行18字 註雙行, 上下內向三葉花紋黑魚尾 ; 28.5 x 18.8 cm.
조선 중기의 문신인신지제의 시문집이다. 고려 충신이며 효자인 신우의 후예이고, 구미파조(龜尾派祖) 신광귀(申光貴)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신몽득(申夢得)이고, 부인은 함안 조씨 이다. 아들은신홍망(申弘望)이고, 형제로는신지효(申之孝), 신지신(申之信), 신지의(申之義), 신지행(申之行), 신지경(申之敬), 신지훈(申之訓) 등이있다. 학봉 김성일과 유일재 김언기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89(선조 22)년 증광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정언, 좌랑, 문학, 부사 등 내외 요직을 역임하였다. 예안현감 때에는 죄수를 석방하여 농사에 전념토록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열읍이 붕괴하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나라는 초토화되었다. 이난국을 타개 하기 위해 경상북도 예안, 안동 겸관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구휼에 전념하였다. 의병 모집 을 위해 단기(單騎)로안동 용궁 방면으로 다니다가 왜병 70여 명에게 포위되었으나 과거 훈방된 죄수가 은공을 갚아 목숨을건진 일이 있었다. 예안, 안동 겸관으로 있을 때 구휼 한백성이 수천에 이르렀다. 다시 예안에 가서 의병장 김해와 약속하여 피차 나라일로 목숨을 잃을 때에는처자를 의탁하기로 하였다. 뒤에 김해는 경주 진중으로 출발하였고, 뒤에순국하였다. 그 때 선생의 백씨가 왜군의 칼에 왼쪽 어깨를 크게 다쳤으며, 혈서로 중씨에게 “국가에 몸을 바쳤으니 나라 일에 전력하라.”하였다. 그 길로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에 진을 쳤으나 1596년 4월 순찰 종사관의 명을 받아 순찰 임무를 띠고 팔공산에 이르러 열읍의 수령에게 전쟁에 나아가 “일사종시 동난사(一死終始 同難事).”하도록 했다. 다시함양 화왕산성에서 망우당 곽재우와 동맹 창의하고 국가에 충성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날때까지 통제사 종사관, 삼영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왜군이물러난 후에는 여러 고을의 판관 등을 지냈다. 창원 부사 재직 시에는 명(明) 화적 정대립(鄭大立) 등을 잡은 공로로 교서를 받고 통정대부로 승진하였으며, 인조 때는승지를 역임하였다.
선무호성훈(宣武扈聖勳) 1등에 올랐다. 퇴관후 권귀(權貴)를 탐하지 않고 낙향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10리나 되는 구미보를 축성하여 주변 땅을 옥답으로 만들었다. 인조반정후 인조의 엄소(嚴召)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전주 판관 재임 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1676(숙종 2년)년 이조참판 증직이 내렸으며,뒤에 사림의 공의가 준발하여 장대서원을 창건하고, 송은 김수광, 회당 신원록, 경정 이민성과 함께 장대서원에 봉향되었다.
이 문집은 1740(영조 16)년 현손 진구(震龜)가 편집, 간행하였다. 문집의시는 창원부사로 있을 때 지은 것을 모은 「회산잡영(檜山雜詠)」, 선성부사로 있을 때 지은 것을 적은 「유청 량산록(遊淸凉山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차자(箚子)의 「헌부차자(憲府箚子)」는사헌부에 재직 당시 왕에게 선정을 바라는 내용이다. 교(敎)의 「교선무공신이광악(敎宣武功臣李光 岳)」․「교호성공신고희(敎扈聖功臣高曦)」․「교오련(敎吳連)」등은 임진왜란 당시 왕이 이들 공신에게 내린 교서로서 임진왜란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서(書)의 「여혹인서(與或人書)」는 병마의 폐단이 농가에 극심하므로 이의 시정을 촉구하는 서찰이다.
6卷3冊 : 四周雙邊半郭 18 x 14.9 cm, 有界, 10行18字 註雙行, 上下內向一二葉混入花紋魚尾 ; 30.1 x 20.6 cm.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의병장인 신적도의 유집이다. 할아버지는 신원록(申元祿)이고, 아버 지는 신흘(申仡)이고, 동생은 신달도, 신열도이다. 청년기에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 에게 배웠다. 학문과 효행이 뛰어났다. 1606(선조 39)년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1627(인조 5)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임금이 피난길에 나서고국사가 어지러운데 신하된 사람으로 산하 에 묻혀 구차하게 생활을 도모할 때가아니다.”하며 원근의 동지들과의병을 모집하고 군량 을 준비하여 밤낮 달려가니 이미 화의를 맺어 적이 물러간 뒤라 어전에 소장을 올려 장한 일이란 비답(批答)을 받고 나라로부터 상운도(祥雲道) 찰방의 벼슬이 내렸다. 병자호란 때 에도 의성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오랑캐와 화친할 수 없으며, 이를 배척한다는 뜻에서 “척화하는 것이당연한 일. 어찌 강화파들은 반대한단 말인가? 오랑캐가 겁나두려워함 이라. 망국 꼴 보려는 왕손매의 심정이구나.”라는척화시(斥和詩) 읊었고, 군사와양곡을 나라에 바쳤다. 나라에서 건원릉(健元陵) 참봉의 벼슬이 내려졌다.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다 는 뜻을 표하기위해 서울에 가서 사은(謝恩)의 예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경상북도의성군 옥산면 금학리의 학소대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날마다 『춘추(春秋)』를읽으며, 비분강개 (悲憤慷慨)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소주(韶州) 산곡에 대명(大明)의일월이 비친다고 했다. 1867(고종 4)년 호조참의 증직이내려졌으며, 단구서원(丹邱書院)에 배향되었다.
이 문집은 후손상하(相夏), 돈식(敦植) 등이 1928년 경북 의성에서 간행하였다. 시는 가행 (歌行)이뛰어나 「채미가(採薇歌)」․「학산구조(鶴山九操)」와 같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서(書)는 정구, 장현광, 정경세 등 당대 명유(名儒)에게 보낸 것이 많다. 잡저는 「성설(性 說)」․「심설(心說)」․「심정정지의변(心情鄭志意辨)」등의 성리학에 대한 것과, 「가계오조(家戒 五條)」․「채미헌기(採薇軒記)」 등이 실려 있다.잠(箴)과 명(銘) 역시 「존양잠(存養箴)」「성 찰잠(省察箴)」․「동벽명(東壁銘)」․「서벽명(西壁銘)」에서 보듯 심성수양에 대한 것이 대부 분이다. 「창의록(倡義錄)」은병자호란 때의 의병활동을 기록한 것으로 이 방면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10卷5冊 : 年譜, 四周雙邊 半郭 19.4 x 16.2 cm, 有界, 10行18字 註雙行, 上下向二葉花紋魚尾 ; 27.3 x 19.9 cm.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학자인 신달도의 시문집이다. 신준정(申俊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 는 참봉 신수(申壽)이고, 아버지는 신흘(申仡)이며, 어머니는 박윤(朴倫)의 딸인 순천 박씨 이고, 부인은이난수(李鸞壽)의 딸인 전주 이씨이다. 어려서 족형인 신홍도(申弘道)에게학문을 배우고, 16세에는 장천서원(長川書院 ;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에서독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아버지를 모시고 황학산(黃鶴山)에 피난했다고 한다. 1596(선조 29)년 안동의 도산서원에 있는 조목을 찾아가 학문을배우고, 역동서원에서 공부를 하였다.
아버지의 권유로장현광의 문인이 되기도 했다. 1603(선조 36)년 장현광이의성현령으로 부임했을 때, 향교에서 수업을 받았고, 광해군시절 선산과 인동(仁同)을 수시로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1610(광해군 2)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1623(인조 1)년 정시에 장원급제하였 으며, 그해 성균관전적과 성환도(聖歡道)찰방에 임명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자 국왕을 모시고 공주까지 따라 갔으며, 그해 전주판관에 제수되고 시폐(時弊)를 열 가지 조목으로 요약하여 「진시폐십조소(陳時弊十條疏)」를 올렸다. 이 후 형조와 예조의 정랑을 거쳐, 1627년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예조정랑, 시강원문학과 필선,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윤황(尹煌)과 함께 적극적으로 척화론을 주장했었다. 전란이 끝나고 4월에는 왕명으로 가도(椵島)에 머물고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찾아가 서 후금(後金)과의화의가 본의 아님을 피력하였으며, 조선인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척화를 강력히 주장함과 동시에 인조반정의 공신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공신들을 공격하였다. 특히 인조반정의유력한 공신 이귀(李貴)를 맹렬히 공격했는데, 이로 인하여 1629년 여러 대신 과 중신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하였다. 1631(인조 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나, 한양 아현 (阿峴 ; 서울특별시마포구 아현동)의 거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1646(인조 23)년 도승지에 추증되고, 1858(철종 9)년 단구서원(丹邱書院 ; 경상북도의성군 봉양면 분토리)에 배향 되었다.
이 문집은 1927년 신홍기(申鴻基)가편집, 간행하였다. 시에는 서정시가 많으며 장현광의 시를차운한 시와 류성룡에 대한 만시(輓詩) 등이 있다. 소(疏)의 「진시폐십조(陳時弊十條)」 는 인조에게 올린 상소문으로 시정의 폐단을 지적하고용현양(用賢良), 택수재(擇守宰), 수 인심(收人心), 여풍속(厲風俗), 납간쟁(納諫爭), 결옹폐(決壅蔽), 신서옥(愼庶獄), 생용관(省冗官), 균전부(均田賦), 수군정(修軍政)의 10개 조항에걸친 개선책을 논하고 있다.
「구퇴후진소회(寇退後陳所懷)」는 1627(인조 5)년 정묘호란 때 금(金)나라군사가 물러간 후 올린 상소로 200년 예의의 나라로서 금나라와 화약은 국가의 막대한 수치라고 지적, 앞으 로는 병력을 증강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군신 간에 동심협력하여 화를 사전에 방비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계(啓) 중에는 주화파최명길에게 법에 의해 참형을 내리기를 청하는 장계 가 있다. 「가도봉사시문견(椵島奉使時聞見)」는 가도에 접반사(接伴使)로 갔다가 돌아와서 1627년 3월 24일부터 5월 8일까지의 보고들은 일들을 조정에 보고한 장계이다.
서(書)에는 시사(時事) 및 이기설(理氣說)과학문적인 논설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잡저의 「남산문목(南山問目)」은 『역학도설(易學圖說)』을비롯, 이기설(理氣說), 사칠논(四七 論), 예설(禮說) 등에 관한 사제 간의 문답을 기록한 것이며, 「유경내고유제생(諭境內告諭諸 生)」은 저자가 전주판관으로 있을 때 유생들에게 알린것으로 주희의 백록동서원규약(白麓 洞書院規約)을 모체로 하여향약 12조목과 학규(學規)20조목을 지어 흥학(興學)에 힘쓰도 록 한것이다. 「강도일록(江都日錄)」은 1627년 정묘호란 당시 1월 17일부터 3월 23일가지 인조의 호가(扈駕)가 강화도로 옮겨질 때의 일들을 기록한것이다.
9卷4冊 : 四周雙邊半郭 19.5 x 16 cm, 有界, 10行18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28.5 x 19.5 cm.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학자인 신열도의 시문집이다. 신수(申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호조참의 신원록(申元綠)이고, 아버지는신흘(申仡)이며, 어머니는전력부위 박륜(朴倫)의 딸이다. 교리 신달도(申達道)의동생이다. 장현광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여 세에 경사(經史)에통달하고, 1624(인조 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06(선조 3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서장관으로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사간원정언을 거쳐 1638년 울진현감을 지내고, 1647년 사헌부장령이 되어 민생에 대하여 상소하였고 뒤에 능주목사를 지냈다.저서로는『선사지(仙槎志)』와 『문소지(聞韶志)』가 있다
이 문집의 서문과발문이 없다. 권1∼3에시 127수, 교서 2편, 사제문(賜祭文) 2편, 소 4편, 계 11편, 권4․5에 정문(呈文) 8편, 서(書) 35편, 권6∼8에 잡저 2편, 서(序) 2편, 발 7편, 상량문 4편, 축문 14편, 제문 17편, 묘표 1편, 묘지명 5편, 행장 4편, 권9에 부록 으로 행장․묘갈명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문집가운데 시는 대체로 기상이 호방하나 감상적인 면이 있다. 그 가운데 「등소공대(登召公臺)」는 소공대에 올라서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는 상쾌한 기분을읊은 것이고, 「야문실솔유감(夜聞蟋蟀有感)」은 밤에 우는 귀뚜라 미 소리를 들으며 가을의 정취 속에서 인생의 무상을 한탄한 것이다.
「문노적동창야불능매(聞奴賊東搶夜不能寐)」는 청나라가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느라고 잠 못 이루는 안타까운 심회를 읊은 것이다.소(疏) 가운데 「무인응지소(戊寅應旨疏)」는 울진현령(蔚珍縣令)으로 있을 때 왕명에 따라 올린 보고서로, 흉년이 계속되어 주민의생활이 어려우므로 세금을 경감하여줄 것과 부역을 줄이며 고을 재정에 국고보조를 하여줄 것을 요청한 내용이다. 계(啓) 가운데 「청물견신사잉자핵계(請勿遣信使仍自劾啓)」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강화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한 조정의 공의에 반대하여강화사신을 보내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고, 「조천시문 견사건계(朝天時聞見事件啓)」는 1628(인조 6)년 동지사은사의 서장관이 되어 7월 11일 서울을 출발하여 명나라의 남경까지 갔다가 이듬해 윤 4월 11일 평양에 돌아올 때까지 도중에서 보고들은 일들과 중국사람들과 통화한 내용들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보고한 여행기록이다. 「정등주군문변무문(呈登州軍門辨誣文)」은등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군대에 잘못 전달되어 명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오해가 생긴 일에 대하여 사실을 밝힌 외교적인 문서이다. 이밖에 장현광에게 입문의 예를 마치고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기록한 「배문록(拜門錄)」과 자기의 사상과 취지를 밝힌 「나재설(懶齋說)」이 있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중도에 해난을 당한 사신을 제사한「제표사신문(祭漂使臣文)」이 있다.
3卷,附錄2卷(合2冊) : 四周雙邊 半郭 18.1 x 13.6 cm, 有界, 10行18字 註雙行, 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 ; 28.6 x 18.6 cm.
조선 중기의 문신인신홍망의 시문집이다. 신응규(申應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몽득 (申夢得)이며, 아버지는 승지 신지제(申之悌)이고, 어머니는 함안 조씨로 조지(趙址)의 딸이 며, 부인은 영천 이씨로 이민환(李民寏)의 딸이다. 1627(인조 5)년 진사시에 급제한 뒤, 강 릉(康陵) 참봉에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9(인조 17)년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 하여 1645년 승문원주서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사직하였다. 1646년 전적․병조 좌랑․정언, 1647(인조 25)년 예조좌랑․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652(효종 3)년 지평이 되었는데 이때 도승지 이시매(李時楳)가 자못 패만(悖慢)한것을 지평 이온발(李溫發)이 상주(上奏)하다가 탄핵을 당하였다. 이때이시매는 자기의 밝음을 선현을 이끌어서 증명 하려 하였다. 신홍망은 이를 듣고 직접 그 소(疏)를 보니 실로 모욕적이어서 이를 단독 으로 왕에게 진달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당론을 타파하고자 하는 마당에 호당(護黨) 한다 하여 탄핵을 받고 벽동(碧潼)으로유배되었다가 두 달 뒤 풀려났다. 1656년 울산부사, 1659년에는풍기군수로 나아갈 때 수령들이 잇달아 관청에서 죽으며 흉흉한 소문이 일자, “내가 그 자리에 나가지않고서는 요망스러운 말을 없앨 수 없다.”라고 말하며 부임하였다 한다.수령이 된 뒤에는 교육을 장려하는 데 힘썼으며 가난한 선비를 도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664(현종 5)년 강원도도사, 사예(司藝)를 두루 지냈다 이후 여러 관직에 제수되 었으나 사직하고 거의 나아가지 않았다.말년에는 주로 고향인 의성의 거처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 1984년 후손들 주도로 건립된 고송신선생유허비(孤松申先生遺墟碑)가 있다.
이 문집은 1739(영조 15)년 증손 진구(震龜)가 편집, 간행하였다. 시는영물(詠物), 풍경, 학문등을 주제로 하여 순후하고 청고한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회산봉한식(檜山 逢寒食)」 3수는 16세 때 지은 것으로 시상과 시관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여헌장선생문(祭旅軒張先生文)」은 장현광이 죽은 것을 애도하여 지은 제문으로 그가학계와 국가에 이바지한 공적을 높이 치하하고 동방의 이학(理學)으로이황의 뒤를 이었다고 칭송하였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신채의 시문집이다. 참의 신원록(申元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흘 (申仡)이고, 아버지는 참봉 신적도(申適道)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로 첨정 윤순조 (尹淳祖) 의 딸이고, 부인은안동 권씨로 권익창(權益昌)의 딸이다. 어린 시절부터 총기를 보이며 학문에 뜻을 두었다. 1629(인조 7)년 향해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며, 1643(인조 21)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향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1646(인조 24)년에는 진사시에 급제 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는데, 성균관에서의학업 활동이 뛰어나 영남의 삼모(三某) 라는 칭호를 받았다. 또한 성균관대사성의 명으로 「태학명(太學銘)」을 짓기도 했으며, 또 세자의 명에 의하여 「성학도명(聖學圖銘)」을 지었다. 1660년에어머니상을 당하고 1664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자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모하듯 지극 정성으로 전후상례를 치렀으 며, 그 후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실천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이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집 앞에 매화나무와 대나무를심고 당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다. 아울러 팔지산(八智山) 아래에별업(別業)을 개척한 뒤,그곳의 지명을 팔지(八智)(현 경상북도 의성군의성읍 팔성리)로 고치기도 했다. 1858(철종 9)년 아버지 신적도, 계부 신열도와 함께 단구서원(丹邱書院)에 배향되었다.
이 문집은 1931년 종손 상하(相夏)가편집, 간행하였다. 시는 대체로 자연시가 많으나 거경(居敬)과 학문에 관한 시도 간혹 보인다. 서(書)는 대부분 학문에관한 서한으로 『중 용』에 관한 연구와 문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답대학문목(答大學問目)」에서는 명덕(明德)에서 혈구(絜矩) 등에이르기까지 질의문답의 형식을 통하여 광범하게 해석하였다. 그 중 지(智)에 대하여 인의예지의 지와 총명예지의 지를 비교, 분석하고 그 동이점을설명 하였으며, 극명덕(克明德)과 극명준덕(克明峻德)의“극(克)”자와 일일신(日日新)과 구일신 (苟日新)의“신(新)”자에 대해서도 구분, 해설하였다. 「용학표리설(庸學表裏說)」은 『중용』과 『대학』은 서로 안과 밖이 되어 연관관계를 가지며, 『중용』의성(誠)과 『대학』의 심(心)은 동정에 관한 표현이라고 설명하면서 이것이 체용(體用)이 되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므로 그 중 하나가 없어도 완전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 글이다. 「책문」에서는 심(心)은경(敬)의 대명사로 심(心)이 경(敬) 없이 작용하는것은 정(正)이 아니고 사(邪)일뿐이며, 이것이 인심 도심설(人心道心說)을 분석하여 설명한 글이다. 이밖에도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대하여 하나하나 설명한 「성학십도명(聖學十圖銘)」이 있는데, 제2의 서명도(西銘圖)가 『소학』과『대학』의 근원으로 『성학십도』의 중추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6卷3冊 : 年譜, 四周雙邊 半郭 20.2 x 16.5 cm, 有界, 11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1.8 x 22 cm.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학자인 신정모의 시문집이다. 신채(申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대석(申大錫)이고, 아버지는 신덕일(申德溢)이며, 어머니는 이성구(李星耈)의 딸 예안 이씨이고, 부인은 안이순(安履順)의 딸 순흥 안씨이다. 숙부인신덕순(申德洵)에게 출계 하였다. 어려서는 중부(仲父)인신덕호(申德浩)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장성해서는 이만부 (李萬敷)에게수학하였다. 1719(숙종 45)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20년에 부정자, 1725(영조 1)년에 지평․정언․사옹원주부 등에 임명되고, 1727년 병조좌랑․강원도사․병조정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다가, 거창부사에 임명되자 부임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이를 막지 못하여 군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석방되었다. 그 뒤 암행어사 이흡(李潝)이 전과를 재조사, 보고하는 과정에서 그 죄상을 과장하여, 1735년 다시 흥양(興陽)에유배되었다. 이듬해 충청도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적소에서 죽었다.1864(고종 1)년 복관되었다. 경상북도 의성군의성읍 팔성리에 그의 유업을 기린 유허비 (遺墟碑)가 세워졌다.
이 문집은 1899년 5세손 상헌(相憲)과 돈식(敦植)이 편집, 간행하였다. 부(賦)의 「효초사체 기추곡유거(效楚辭體寄楸谷幽居)」․「감춘(感春)」, 사(辭)의 「우중낙사(憂中樂辭)」, 시의 「상춘만영(賞春謾詠)」 등은 모두 현실 도피적 은둔생활에 대한서정과 비애를 그리고 있다. 서(書)에는 이재와 왕복한 것이 여러 편 있는데 주로 『주서강록간보』와『근사록』에 관한 의문점을 문답한 내용이다. 이만부(李萬敷)와의 왕복서찰에는거경(居敬), 궁리(窮理) 등 학문의 실천방법에 관하여 언급한 내용이다. 잡저의 『아림현방유절목(娥林縣榜諭節目)』은 삼강오상(三綱五常) 등 고을백성들이 지켜야 할 9개항의 절목을 기술한 것이다.
「입춘일서시백아육장(立春日書示伯兒六章)」은 아들에게 훈계한 것으로 교경(矯輕), 경타(警 惰), 면겸(勉謙), 계눌(戒訥), 교독(敎讀), 욱행(旭行) 등 6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상례기의(喪禮記疑)」는 당시 논란이 많았던 변례(變禮)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한 글이며, 설(說)의 「경설(敬說)」은 중국의 역대 선현들의 말은 인용, 경(敬)에 대하여 자세히풀이 하고 존양복초(存養復初)의 양법(良法)임을 역설한 것이다.
影印本(木板本). - 서울 : 景仁文化社, 1994. - 【韓國歷代文集叢書(1026-1027)】.
2冊 : 23 cm.
조선 중기의 학자인신체인의 시문집이다. 신숙범(申叔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분구 (申賁龜), 아버지는 신도만(申道萬)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로 김민행(金敏行)의 딸이며 부인은 풍산 류씨로 류후원(柳後元)의 딸이다. 3∼4세 때이웃집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 면 말도 없이 그 집에 가서, 글 읽는 소리를 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어려서 화장산(華藏山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일대)의 초당에서 공부하였고, 장성해서는 김낙행, 임필대, 이상정의문하에서 수학하였다. 30세 무렵에는 유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의술․병가․산수(算數)․복서(卜筮) 등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 했다고 한다. 1761(영조 37)년 향해에 응시해서 장원하는 등 학문적 명성이있었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1782(정조 6)년 금산(錦山)에 금연정사(錦淵精舍 ; 현 금산서원 (錦山書院))가 완성되자 그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786년에는빙계 서원(氷溪書院)의 교석(敎席)을 주도하며 통강례(通講禮)를 행하고자, 주자(朱子)의 월삭회약 (月朔會約)을모방해 의절까지 정해 놓았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1788년 눈병으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자, 존양(存養) 공부에 열중하였다. 1807(순조 7)년 경술과 문장이 모범이 된다하여 의성현령이 천거하였고, 경상도관찰사가 연이어 신체인의 학행을 조정에 계청하였다. 이상정의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280여 명의 인사들과 호문학단(湖門學團)을 구성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호문학단 중에서도 그는 학문이 뛰어나호문육군자(湖文 六君子)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저술로는 ‘경(敬)’의요체에 대해 설명한 4권 2책의 『숭경록(崇敬錄)』을 저술하였으며, 정만양, 정규양 형제의 어록인 『훈지양선생어록(塤篪兩 先生語錄)』도 산교(刪校)하였다. 한편, 『아주신씨참판공파보』에는 『징성록(徵省錄)』을 저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에 있는 금산서원에 신지제 (申之悌), 신지효(申之孝)와 함께배향되어 있다. 금산서원은 신체인이 강학을 위해 1782년건립한 금연정사를 1977년 중건하고, 1981년 서원으로승격한 것이다. 신체인의 위패는 신지제와 함께 1977년배향되었다.
이 문집은 19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書)인 「여대산이상정(與大山李象靖)」 은 스승 이상정에게 네다섯 차례에 걸쳐 학문의 방법과 학문하는 가운데 생긴 의문에 대 하여 질의한 내용이다. 또한 이상정이 보내준 「경겸중화(敬兼中和圖)」에 대해 이견을 제시 하기도 하였다. 학문은 순수성을 중요시하는것인데 공연히 상을 세우고 구차하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오히려 학자들의 의문을 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문이었다. 또한 「경겸중 화도」와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으니 이는 그 모방에 지나지 못한 것이라고 논하였다.「창명집구도(銹銘集句圖)」는 선현들의 잠언과찬언들을 모아 『창명집』을 만들고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중앙에는 경(敬)자를 붙여 모든 항목을 총괄 하도록 하였다.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은당시 전파되기 시작한 천주교에 대한 평론이다. 천주교가 불교와 같이 의리에 맞는 것 같으나 실은 의리에위배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신봉할 가치가 없다고 강조하며 강력하게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난리일기서(亂離日記序)」에서는 병산(屛山)에 가서 남업의 『병자호란일기』를 보고 병자 호란의 전말을 분명히 알게 되었으며,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강화할 때 청인들에게 당한 모욕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며 울분을 토로하였다. 이 밖에 선현들의 교훈을가려서 실천의 지표로 삼았던 「좌우명(座右銘)」과, 이상정의 죽음을 애도한 「제대산이상정(祭大山 李象靖文)」, 글을 읽으면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 바로잡은 「독서유록(讀書謬錄)」이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신면주의 시문집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신중모(申重模), 할아버지는 통덕랑 신황(申煌),아버지는 통덕랑 신홍교(申弘敎), 어머니는 풍창군(豊昌君) 류유(柳濡)의 딸인 공인(恭人) 풍산류씨, 부인은 성언병(成彦秉)의 딸로 숙부인 창녕 성씨, 후부인은 이제동(李濟東)의 딸로 숙부인 진성 이씨이다.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서 출생 하였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두각을 보여 5세에 글자를 알았고, 7∼8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14세 때에는 도내 백일장에서 장원을차지하였다.
1791(정조 15)년에는 형 신면조(申冕朝)와 함께 어부정(漁父亭)을짓고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1798(정조 22)년생원시에 합격하여, 이미 생원시에 합격했던 신면조와 함께 형제가 나란히 성균관의 적(籍)을 가지게 되었다. 1805(순조 5)년에는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곧 승문원정자에 임명되면서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810(순조 10)년 율봉도(栗峰道) 찰방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818(순조 18)년에 다시 성균관전적과 병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형 신면조와 어머니, 그리고 외아들 신명협(申命協)의 상사가 잇따라 일어나 고향에 머물러야 했다.
1821(순조 21)년 사간원정언,1822(순조 22)년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며,1825(순조 25)년 용양위부사과로 선전관을 겸직하였다.이어 1826(순조 26)년 사헌부지평과 함경도도사를역임한 후, 1828(순조 28)년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어경연검토관과 춘추관기주관을 겸임 하였으나, 당시 대리청정 중이었던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병환을 이유로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1829년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며, 이어 시강원필선, 홍문관부수찬, 홍문관교리 등에 차례로 임명되며 세자와 서연(書筵)에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했다.
1830(순조 30)년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만장(挽章)을 지었다. 이어이듬해까지 사헌부 집의, 홍문관수찬, 홍문관부교리, 다시 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되나 병환으로 오래 관직에 있지를 못하였다. 한편, 신면주는 효명세자 사후 홍문관에 있으면서 효명세자의 측근들을 공격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이 효명세자 대리청정 때 전권을 휘둘렀다는 이유 에서이다. 우선단독으로 상소를 올려 효명 세자의 최측근이었던 김로(金鏴)와 그와 체결 한 이속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또한 김노경(金魯敬)의 국청을 요구하는 삼사(三司)의 합계(合啓)에 참여하기도했다. 1834(헌종 즉위)년 순조 장례 때 봉폐관(封閉官)이 되었으며, 그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1835(헌종 1)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헌종을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소학(小學)』을 강론하였으며, 이어사헌부집의, 용양위부호군, 승정원동부승지 (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다시병환이 도져 사직을 요청하였고, 헌종은 사직하는 신면주에게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내렸다. 이 문집은 당시 유행하는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내린윤음을 기록한 것이다. 은퇴 후 고향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이상정의 학통을 계승한 가학을 이어 받았다. 학문이 뛰어나 당시영남 출신으로 드물게 홍문관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수시로 경연․서연에 참석해 학문을 강론하였다.
이 문집은 1981년 4세손 석기(碩基) 등이 편집, 영인하였다. 시는「강태극도설(講太極圖 說)」등 유가의 학설과 관련된 것, 「동고관등경차백씨운(東皐觀燈敬次伯氏韻)」 등 차운시와 만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왕세자만(王世子挽)」은 1830(순조 30)년 왕세자의 장례 때 지은 배율 140운의 시로서, 조정의 신하들이 감복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 기행시로 「속리산법주사배백씨차제우운(速離山法住寺陪伯氏次諸友韻)」․「문장대(文藏臺)」․「고정(古鼎)」․「금강굴(金剛屈)」 등이 있다. 소(疏)의 「사교리소(辭校理疏)」는 1828년 교리 를 사직하며 올린 충언의 글로서 끝에 성학사도(聖學四圖)가 부기되어 있다. 홍문관에서활동한 저자의 성리학적 인식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신석우의 시문집이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한 후로 황조산 (黃鳥山) 아래에 봉정(鳳亭)을짓고 숨어살았다. 대원군이 영남 유람 길에 찾아와서 의기가 서로 맞아 시를 지어 공에게 주기도 하였다. 1866(고종 3)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공은 류후조를 호동사제(壺洞私第)로 찾았으며 류후조 반겨주었으나 “이곳이 초야의 선비가 오래있을 곳이 못 된다.” 하여 돌아왔다. 류후조의 추천으로경상도 연보전도유사(捐補錢 都有司)가 되었으며 1876(고종 13)년 일본과의 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 홍재학(洪在 鶴), 황재현(黃載顯)과 함께 상소하여 그 불가함을 논하였다 한다.
이 문집은 1962년에 그의 현손인 용호(龍鎬)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소(疏)의 「병자척왜소 (丙子斥倭疏)」에서는 1876(고종 13)년개화와 친일을 주장하는 박영효(朴泳孝)의 처벌을 촉구하고있다. 잡저 가운데 「용학발문(庸學發問)」에서는 『중용』과『대학』에서 난해한 부분을 의문형식으로 문목을 만들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또, 「통도내교원각유소문 (通道內校院各儒所文)」은 병인양요 때 경상도 각 향교와 서원에 보낸 통문으로서, 유학전통의 규범과 질서를 수호하려는 확고한 신념에서 척사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삼 정책(三政策)」은 1866년에실시한 경시(慶試)의 책문으로 채택은 되지 않았으나 전부(田賦)․군적(軍籍)․환곡(還穀)에 대한당시의 폐단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시정을 촉구한 것으로, 당시의 국내정세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며, 또한 삼정법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
3卷2冊 : 四周雙邊半郭 21 x 14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27 x 18.5 cm.
조선 후기의 학자인신상헌의 시문집이다. 창협(昌協)의 아들로 의성에서 살았다.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여러동지들과 모여 통곡하였다. 그리고 이내 이만도가 순국하 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로도해(東魯蹈海), 서산채미(西山採薇)” 등의 문구로써 만사(輓 詞)하여뒤따르지 못함을 한탄하였으며, 왜정으로부터 나오는 배급은 일절 받지 않았다. 그는 당시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계획으로 둘째 아들 계환(啓煥)을 간도(間島)로 보내어그 지역 풍토를 조사토록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성리학에 조예가 있었는데, 잡저(雜著)의 「인심도심(人心道心)」을 비롯하여 「성(誠)」․「존양성찰(存養 省察)」등에서 선현들의 성리설을 바탕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2卷1冊 : 世系 ; 四周雙邊 半郭 20 x 15.7 cm, 有界, 10行18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1.5 x 20.7 cm.
고려 말 조선초의 효자로 이름이 났던 신우의 실기이다. 아버지는 신원유(申元濡)로 고려 충렬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군기시별검교사(軍器寺別檢校事)를 지냈다. 신우는 고려 충 혜왕 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봉상(奉常)․사헌부장령을 거쳐 호군에 이르렀다.
일설에는 전라도안렴사에이르렀다고도 한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친의 3년 상 시묘살이에호읍(號泣)하기를 그치지 않아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죽순(竹筍)이 쌍출(雙出)한 일이 조정 에 알려져 정려(旌閭)를내리고 살던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고 불렀다. 지금의 경북 의성 군 구천면 청산리이다. 상주(尙州) 단밀현(丹密縣)에 거주하였다. 일찍이 정몽주에게서 대의 (大義)를 들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조카사위인 길재(吉再)와 고향 상주의 망경 산(望京山)에 은거하였고 태조와 친구 사이로서 형조판서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행실은 『국사(國史)』․『여지승람(輿地勝覽)』․『삼강록(三綱錄)』에 실려 있다.
4卷2冊 : 四周雙邊 半郭 20 x 19.1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29.8 x 20.9 cm.
조선 후기의 학자인 신상하의 시문집이다. 생부는 신명호(申命祜), 어머니는 김정진(金精進)의 딸인 안동 김씨, 계부는 신인협(申寅協), 계모는 이관발(李觀發)의딸인 영천 이씨, 할아버지는 신면목(申冕穆), 증조할아버지는 신만교(申萬敎)이다.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할아버지 신면구(申冕九 ; 생부 신명호의 아버지)에게서수학하였으며, 15세 때 고문(古文)과 경전(經傳)을 두루익혔다고 한다. 1853(철종 4)년 할아버지 신면구는 세상을떠나기 전, 장성하면 류치명 문하에서 공부하라는 유언을 신상하에게 남겼다. 23세가 되자 신상하는 유언대로 류치명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문하에서 당대의 명유 이돈우(李敦禹), 김도화 등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1864(고종 1)년에는 봉두산(鳳頭山 ;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일대) 남쪽에 강학을 위한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이후 신상하는 관직에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1891(고종 28)년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이헌영(李永)은 『향약절목(鄕約節目)』을 편찬한 뒤, 도내 각 고을에 배포하며 향약시행을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의성 지역에서도 향약시행을 위한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신상하가향약장(鄕約長)을 맡았으며,향교와 구호서당(龜湖書堂 ; 경상북도 의성군봉양면 구미리에 위치)에서는 직접 강학(講學)을 하였다.
1893(고종 30)년 인근 군위로이주하였다가, 1895(고종 32)년에는 풍기군으로 다시거처를 옮겼다. 1906(광무 10)년 3월 22일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문집은 1955년 아들 성환(成煥)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는청아하고 품격이 높다. 「자지가(紫芝歌)」는 지치의 향기가 다른 풀보다 뛰어남을 칭찬하고 사람도 지치처럼 남보다 뛰어나서 향기를 풍겨야 한다는 내용을옛 가사의 형태로 표현한 것이고, 「원조우음(元朝偶吟)」은 세월이 자꾸만 가는데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여 안타까운 심중을 읊은 것이다. 서(書) 가운데 「상정재선생(上定齋先生)」은 스승인 류치명에게 학문하는 방법과 요령을 물은 것이며, 별지의 문목은 『중용』과 『대학』에 대해 의심나는 것을 질의한 것이다.
「용학강의(庸學講義)」는 구호서당(龜湖書堂)에서 강의한 내용을 적은 것으로 성리학을 비롯하여 계구(戒懼), 근독(謹讀), 혈구(絜矩) 등에 대해서언급하고 있다. 「사문일수록(師門日受錄)」은 1861(철종 12)년 5월 7일부터 18일까지 12일간 류치명과 학문에 대하여 문답한 것을 구체적으로 적은 것이다.
「서향약절목(書鄕約節目)」는 1891(고종 28)년 경상도관찰사인 이헌영(李憲永)이 풍속을 순화시키기 위하여 『향약절목』 1책을 각 시군에 나누어주고 향약을 시행하도록 권장하였는데 그것을 시행하면서 소감을 쓴 것으로 향약의 발생과정과유래, 시행의 효과 등을 설명하고 있다.